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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눈 오는 날 -임창현

내 어제가 온다 오래, 오래된 어제가 온다 친구의 편지 같이, 열여섯 그날 아내의 얼굴 같이, 온다 떠나간 자식들의 어린 날 얼굴, 얼굴, 나도 온다 나도 소년 되어 온다. 벌써 겨울이 저만치 왔다. 남자들은 가을과 겨울을 좋아한다. 화자는 아침 여섯시면 꼬박 산책을 나간다. 언제나 조금 키 작은 여자가 뒤따른다. “물렀거라, 귀인 행차시다, 물렀거라.” 아내를 뒤세우고 막대기로 아침 숲 가른다. 숲 속 거미줄 헤치며 가는 것이다. -아침마다 밟아서 잎들이 납작해졌네. 새 낙엽이 그 위로 더 질 테고, 이내 또 눈 내리겠지? 매일 아침 우리는 이 길을 건너 하루만큼씩 저 아래 삶으로 내려가는데 숲, 나무, 바위들은 언제나 저대로이지. 언제나 저대로---.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허무하잖아?” “그래, 아무것도 우리를 돌려놓을 수 있는 건 없겠지.” 화자가 말하고 여자가 하는 대답이다. 무상한 세월을 탓하는 화자의 아픔이 달리 갈 곳도 없다. 확실한 사실, 다시 지고 가는 가을, 뒤에 올 겨울 숙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감이다. 시인의 가슴 속엔 벌써 예감의 눈이 온다. 어릴 적 기억처럼, 설렘처럼, 사랑하는 아들의 앳된 얼굴처럼, 자신의 소년 때처럼. 그 시절 맞던 눈, 티 없이 맑았던 얼굴처럼, 우리들의 눈망울처럼 익숙한 환희가 온다. 화자는 벌써 깊은 가을 속에서 겨울을 맞고 있다. 눈을 맞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녀의 마음’처럼 시인은 언제나 미리 느끼고 준비를 하던가? 눈 속에는 그리운 사람들이 내려온다. 하늘 가득 전생 살았던 사람들이. 그래서 화자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기쁨은 하얗다. 그리운 사람들이 세상 고향 잊지 않고 오는 겨울, 시인도 죽으면 눈 되고 싶다. 눈 되어 다시 이 땅에 돌아오고 싶다. 올해는 동남부에도 눈이 많이 온다는데---.

2018-01-03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기억(記憶) -임창현

못내 그리웠던 안부, 박남수 선생 만났네. 고목(古木) 허리, 사슴 다리 꿈에도 깨끗이 늙고 있었네. 살아서도 키 컸던 시인, 큰 나무 곁에 나무 되어 서 있었네. 머리는 사슴의 관(冠) 되었네. 깊은 그의 눈 속 새들 집 짓고 당뇨를 누르는 데는 두부가 좋다는데 식당 아저씨 또 달게 해 갈비탕 국물만 마시고 나왔네. 공항 출구에서 사라지는 모습, 다시 돌아보는 사슴의 다리, 마른 등 휑한 눈, 나도 사슴 되고 있었네. 내일 모레 저럴까 나도 이슬 맺혀오는 선생님의 눈, 나도 그렇게 거기 함께 오래 서 있었네. 우리들은 꿈에서도 생시처럼 이별을 했네.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이다. 소망도 증오도 슬픔도 기쁨도 더러는 꿈으로 오고 간다. 레이건 내셔널 에어포트의 출구를 빠져나가던 스승의 모습을 만난 것이다. 생시에도 나무처럼 키 크셨던 그가 꿈에도 키 큰 나무 곁에 서 계셨다. 몇 년쯤은 더 가까이 뫼시다 헤어지고 싶었는데 그리 못해 화자는 꿈속에도 더러 만나게 되나보다. 꿈 속 시집의 소로(小路)를 걷던 사슴의 관 같은 머리와 새 같은 다리, 깊이 팬 눈 속, 새들이 울고 있었다. 선생님은 새의 시인이었다. 화자의 시 새에도 한줄 더 보태주셨다. 진한 기억, 그 고마움 다시 환생한 것일까. 생전에 실제 있었던 사실이 필름처럼 재생되어지는 꿈, 꿈은 인간의 블랙박스다. 살아 꿈꿀 수 있는 동안 꺼내볼 수 있는. 미련 때문이리라. 시인도 거기 오래 서 있었다. 꿈속에도. 워싱턴에서 가시던 그날 공항 출구에서의 어쩐지 마지막일 것만 같은 헤설프던 모습, 아직도 화자에게 아리게 남아있음에랴. 선생님 그립다. 참 깨끗한 시인이셨다. 더 자주, 더 잘 해드리지 못했던 것 못내 마음 아프다. 자살한 헤밍웨이보다 객사한 에드가 알란포우 보다 더 외로운 삶 살다 가셨다. 상배한 자신도 혼자, 아들도, 출가했던 딸도 혼자 돌아와 모두 혼자들이 되었던 가족, 그렇게 살았던 시인의 집, 한 후학의 설운 기억모퉁이에 남기기에는 너무 아쉬운 미련 남는 시인이다.

2017-12-21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존재(存在) -임창현

내게 어머니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날, 그때부터 어머니는 존재하더라. 그때부터 시작하더라, 인생은 어머니가 없는 겨울, 이 빈칸 어미의 둥지에서 떠나 어둠 처음 만났던 새도 밤하늘 두려웠을까 외로움은 날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날, 불현 듯 어느 날, 나도 어머니 곁 가게 되리라. 절실한 것이 막상 부재할 때 존재를 더 필요로 하게 되고 절감하는 것. 그렇다.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절실한 존재의 실체는 돈보다도 어머니라는 울타리이리라. 장성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머니를 대신한 아내라는 존재는 돈보다도 더 최상 최적의 배필이리라. 그게 바로 better half던가. 건강과 돈, 그것은 그 다음쯤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과 죽음이 문학의 영원한 테제요 화두(話頭)리라. 막상 어머니가 생존하시어 가까이 계셨을 때는 몰랐던 절대의 존재, 그 무게. 그러나 여의고 난 후의 그 빈칸은 우주처럼 거대한 공허로 밀려오는 것이다. 바로 그제서야 어머니의 존재와 필요가 실존한다. 어찌 보면 바로 그때부터 참으로 혼자 가야할 인생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대역, 그 반쪽이 다시 그 자리를 완벽하게 메꾸어줄 때까지. 그러나 그 반쪽은 완벽한 반쪽(better)일 수도 있고 아닐(bitter)수도 있다. 어머니를 잃었던 날, 그 첫날의 공허와 두려움, 그것을 시인은 새에게도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미의 둥지로부터 떨어져 나온 새도 그 첫 밤은 어두운 하늘이 두려웠을까-. 외로움이란 두려운 것이다. 더러는 무섭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출생에서 종멸(終滅)에 이르기까지 단지 그렇게 외로울 뿐이다. 삶이란 외로움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그런 게 존재의 존재요, 존재의 부존재 아니던가. 누구나 다 앞서 가신 어머니 곁 가게 되리라.

2017-12-13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무의미(無意味) -임창현

지상을 떠나 고공 더 높이 올라가 보면 알지 세상 모든 것들 얼마나 작은가를 내게는 우주만큼이나 커다랗던 나의 삶, 그것도 아무 상관 않을 사소한 일들이라는 것을 내가 그곳에서 멀어있듯, 모든 인연도 그만큼 멀어있다. 무관, 내가 하나의 점으로 남듯, 지상의 모든 존재도 무관의 점으로 남는다. 구름보다 더 높아졌을 때만 보이는 점, 아무도 상관 않는 존재와 의미, 다 버려도 된다는 것 그 확인. 지상을 떠나 하늘 높이 이륙해 아래를 내려다보면 알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 얼마나 작은가를. 더욱이 아트만이라는 하나의 존재는 브라만 속 먼지 하나 정도에도 버금 못할 참으로 미미한 존재임을. 내게서는 나의 삶과 존재가 우주와도 바꿀 수 없으리만큼 소중한 의미로 자리하고 있었지만, 비행기 타고 하늘만 올라가 보아도 그게 아님 알게 된다. 광활한 무변의 우주 안에서는 지구조차도 무의미하게 가까울 만큼 작은 존재다. 태양계, 은하계 등 천체 속의 수많은 항성들을 셈해볼 때 말이다. 하물며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의 소유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한갓 미진의 존재요 천체 안에서는 무의미에 가깝다. 아무도 상관 않는 ‘나’ 라는 이 미세한 존재,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래서 무관(無關)한 점으로 남는다. 구름보다 더 높이 올랐을 때에야 더 확실하게 보이는 자아, 이 미미함, 당장 사라진다 해도 그 누구, 그 무엇하나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사실, 이 확인. 사람들 가끔 지상에서 고공에 오를 필요가 있다. 존재와 의미, 존재와 무의미, 그 경계 확인 확인할 수 있는 비정한 현실 만나기 위해.

2017-12-06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릴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아름다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 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아름답게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살면서 헤어져야 할 일 있을 때, 그때도 숭고한 이별을 하고 싶다. 꽃잎이 떨어지면 완성하는 꽃들의 이별처럼. 그렇게 우리도 꽃처럼 왔다가 꽃처럼 가는 꽃잎처럼, 누구에겐 가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한다. 왔다가 가는 일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처럼 삶의 이치임을 받아들이면서 대자연과 함께 맞이하고 보내는 일이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아름답게 여겨지는 시인의 서정을 읽다 보면 지난날 혹 우리들의 설된 언동이나 생각으로 뉘에겐가 서운하게 한 일이나 사람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고속으로 달리는 디지털의 시간과 공간에서 사람 사는 내음이 아날로그 감성으로 다시 우러나게 한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게 나는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었던가?

2017-11-30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악수(握手)

악수(握手) 임창현 우리 꼭 악수를 해야만 할까 그래, 그냥 그렇게 모른 척 스치며 사세 어차피 서로 속마음 붙잡지 못할 것을. 너, 나, 따로 가는 길 굳이 연 있는 양 붙들 것도 없지. 그래, 그렁그렁 눈물 같은 세상, 그렇게 감추며 흘리며 사는 세상 떨어져, 떨어져서 모른 척 사세 그래, 다시 속마음 내 놓고 눈물 젖은 두 손 서로 잡고 싶을 때까지. 세상 살다 보면 좋은 사람, 싫은 사람, 잘도 만나고 잘도 헤어진다. 때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하는 게 악수다. 죽도록 진 빚쟁이나 원수가 아닌 바에야 그저 맥없이 한 번쯤 붙잡고 흔드는 게 악수다. 남자의 세계다. 원래는 내 손에 해칠 무기가 없고 그럴 의사도 없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악수하는 그 손 마음속에는 증오도 미움도 숨어있을 수 있다. 마음 악수 없는 손 악수, 숨쉬기 같은 정치인들의 악수, 그게 참 악수이던가. 악마와 손잡아도 악수는 악수다. 그건 남자들의 순수한 거짓말이다. 그것이 인간의 악수다. 동물의 세계에는 없는 악수다. 웃음 속에 칼이 있듯, 그런 웃음 같은 악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그냥 모른 척 스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는, 그런 악수도 있다. 어차피 마음속 정으로는 붙잡지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을 그저 맥없이 붙잡는 것이다. 돈 드는 일 아니니 그저 붙잡아주는 것인지. 마음 떨어져 사는 사람끼리는 굳이 악수란 걸 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이럴 땐 가벼운 미소나 한 잎 날려주고, 손 반쯤 들어 보여주면 더는 악의 없는, 서로의 아름다운 보시(普施) 아닐까?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2017-11-08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손이 하는 말

손이 하는 말 임창현 말 없는 말 소리 없는 말 혀 있어도 손으로 하는 말 수화(手話), 다투려거든 혀 말아서 감아두고 모두, 우리 모두 손으로 이야기 하자 나무처럼 꽃처럼 강처럼 별처럼 손 말은 수화(手話)다. 혀가 일을 하지 않으니 손과 손가락으로 말을 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비극이다. 그러나 이 비극이 한 치 혀로 세상을 들쑤시는 희극보다는 아름다운 비극이다. 한 치 혀가 더 무서운 칼이다. 비극의 뿌리다. 인간에게 주어진 구규(九竅) 중 가장 조심해야 할 구멍, 그 첫 번째 구멍인지도 모른다. 나무의 말처럼, 꽃들의 말처럼, 바위들의 말처럼, 우리도 모두 손으로, 얼굴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수화에도 욕이 있고, 분노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소리가 없으니 비다혈(非 多血) 아닌가. 무성(無聲)의 조용한 품위 아닌가. 수화는 시적(詩的)이다. 수화를 같이 배워 소리를 질러야 할 때, 격노할 때, 비참한 격조로 음성이 올라가야 할 때, 그때는 수화로 했으면 좋겠다. 별처럼.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듯, 발음은 은이요 수화는 금이다. 드라마 속 수화도 좋더라. 그들의 눈과 손, 그것은 엄숙한 종교를 향한 눈 같다. 어쩌면 표현의 종교다. 때로 차라리 수화하는 사람이 부럽다. 그들은 그만큼 따뜻하게 보인다. 목회자가 말씀을 마치고 감은 눈으로 두 손 들고 이르는 축도의 순간, 그것은 하나님께 손으로 드리는 고백이요 기원이요 말씀이다. 손 말, 손은 몸의 시다.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2017-10-18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가을 서정(抒情)

가을 서정(抒情) 바람 가볍고 볕 따갑지 않은 오후 나무들 벌써 웅크린다 낙엽 긁는 손끝으로 스며오는 차가운 정기, 아직 살아있는 낙엽 말이리라 삶이란, 무언가 긁어모으는 갈퀴 같은 손 오후 산 그림자 전율처럼 스쳐간다 석양에는 바다에 나가 여름을 전송하며 싱싱한 게 들어 올리고 그 바람 너에게도 주고 싶다 아직 둥글지 않아 더 차가와 뵈는 달밤 새 낙엽 위해 묵은 잎 태운다 낙엽 없으면 가을도 아니지 세상 살기 더러 싫은 듯 허탈해지거든 산다는 게 그렇게 시시하거든 맘껏 먹거나 마셔보라 하더라 있는 대로 배설해 보라 하더라 만강으로 채우고 비우는 단세포의 율동으로 모든 거룩한 것들과 시시한 것들을 낮은 곳으로 내려오게 하라더라 낙엽의 말 화씨 50도, 초가을 되면 해도 그리 따갑지 않다. 어언 한해의 삶 마감하는 나무들의 겨울 잠 채비가 시작된다. 나뭇잎들 웅크리기 시작한다. 낙엽 긁는 손끝에도 가을 정기 스민다. 아직 떠나지 않은 잎새들, 어쩌면 그들의 숨소리일지도 모른다. 낙엽을 긁는데 왜 삶이 비칠까. 억척스레도 살아가는 고달픔, 갈퀴 위로 오버랩된다. 삶이 그만큼 힘겹고 고단 해설까? 지는 석양으로 비껴가는 일순의 산 그림자, 전율처럼 스친다. 신의 옷자락 같다. 바닷가에 사는 죄로 가끔은 바다에도 문안을 드려야 한다. 여기선 해가 바다에서 떠서 바다에 지는 것 같이 믿으며 살고 있으니까. 덕분에 가끔은 바다낚시도 가고 살아 있는 게들의 얼굴도 본다. 바닷바람도 게처럼 싱싱하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청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 역동적인 것들을 만나면 언제나 그리운 너에게도 모두 주고 싶은 것이다. 가을 서정이 안고 오는 시적 화자의 애정이다. 그리움이란 그런 사람 생각하며, 마음 건네며 사는 것, 언제나 하루의 마지막에 남는 일기(日記)다.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2017-09-28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말씀과 삶 -박민혁

말씀과 삶 -박민혁 요구하지 않은 기도는 하지 말아줄래요. 나의 믿음은 도덕적이어서요. 많은 이웃을 사랑했어요. 양쪽 뺨 정도는 마음껏 내어줄 수 있지요. 성애도 사랑이니까요. 퍼즐을 꼭 맞춰야 하나요? 예쁜 슬픔 한 조각이 갖고 싶을 뿐이에요. 일생을 학예회처럼 살고 싶지는 않네요. 어린이를 연기하는 어린이는 끔찍하죠. 칠 흙 같은 밤에는 차라리 하늘을 보고 걷듯, 내 기도는 지속되지만 아멘을 발음할 땐 신중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절망은 내 탓이 아니죠. 비극은 생의 못된 버릇 같은 거니까. 강대상 뒤에는 당신 몸에 꼭 맞는 침대 걸려 있는데 아버지 외박이 잦네요. 남을 미워하는 건 이젠 관두기로 했어요. 내 온실 속에는 꽃 피우는 고통만 들이기로. 통증 없는 삶은 결코 범사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플라세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형제들이여, 너의 죄는 희대의 형식이어서 제게 돌을 던질 자격을 드리기로 합니다. <커다란 손에는 잘 벼린 말씀과 한 줌의 인간들, 내 자유의 전장에는 방패 같은 톨레랑스> 칠흑 같은 밤, 그 하늘의 별처럼 걸을 때도 기도는 있어야 했다. ‘아멘’을 함부로 발음할 일이 아니다. 반복되는 절망은 우리 탓이 아니다. 통증 없는 삶이란 범사가 아니어서 당신 같은 플라세보가 있어 다행이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기도는 희대의 형식이어서 제게 돌을 던질 자격을 서로 인정하자. <커다란 손에는 잘 벼린 말씀과 한 줌의 인간들. 내 자유의 전장에는 방패 같은 톨레랑스!> 비극 같은 이야기지만 가장 진솔한 기도 같은 <말씀과 삶>이다. 신이 요구하지 않는 기도는 하지 말 일이다.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2017-09-14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봄을 지우는 방식

봄을 지우는 방식 허은희 링거에 매달린 금식이라는 글자 몸 안으로 쏟아진다 잘 아는 초대하지 않은 사람의 방문은 쨍한 햇살에 놀라 후다닥 블라인드를 내릴 때처럼 무섭고 겁이 나 안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일주일 지나 죽을 삼키다 혀를 깨물었을 때 알았지 떡볶이와 라면, 아는 맛의 유혹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통증이라는 걸 기어이 어둠을 꺼내 불안을 숨기는 밤 돋보기를 들고 누가 내 속을 들여다보나 손전등을 비춰도 들키지 않을 자세로 다락방에 최대한 낮게 구겨져 더 멀리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에 놀라 안경을 벗고 안개를 쓴 채 회진을 받는다 봄은 니힐리즘의 표정으로 꽃을 피우고 지게 한다. 꽃필 때의 봄은 따뜻한 햇볕으로 희망을 익히고, 꽃 질 때의 봄은 하염없는 꽃내음으로 니힐리즘에 젖게 한다. 봄은 꽃을 활짝 피웠다가 지게 하면서 우리에게 인생학습을 시킨다. 나는 타자가 꿈꾸는 욕망을 지향하므로 타자를 만나면서 봄을 맞이하지만, 타자에 의해 지울 허무주의를 배우기도 한다. 인간은 타자를 만나면서 주름과 애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잘 아는 사람이 무섭고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나를 잘 아는 타자는 호수에 뜬 달을 보듯 나의 겉모습만 본다. 호수에 비친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듯 타자가 나를 보는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를 잘 아는 타자는 안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모른 채 나에게 고통을 준다. 나와 그가 만든 동상이몽의 봄날을 잔인하게 떠올리게 한다. 왜곡된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는 타자라는 꽃이 따뜻한 햇볕에 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주제는 머리 없는 토르소이다.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2017-07-27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정호승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극과 극, 그 양 끝을 보라. 한 극 뒤는 바로 다른 편 극 아니던가. 절망을 먼저 하고 절망을 사랑하자. 절망과 끝없이 화해하고, 그리고 보이는 희망을 보자. 자세히 보자. 희망이 희망한다고 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누가 희망의 실체를 거절하겠는가. 희망은 절망의 밑바닥까지 다 내려간 후 그 단단한 절망 위에 세운 희망이 싹틀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절망이여 오라. 얼마든지 오라. 다 받아줄게. 그렇게 절망을 사랑하자. 쓰디쓴, 아픈, 그 절망을 다 받아준 사람이 아니고서는 희망을 품을 수도 말할 수도 없으리라. 그렇게 절망은 희망 앞서 유효한 것이다. 희망이란 말은 젊은 세대는 물론 나이 먹은 사람들도 그 단어 앞에서는 가슴이 설렌다. 누구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다. 유토피아와 샹그릴라에 대한 동경이 부정적인 현실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처럼 희망은 절망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절망적인 현재 안에서 ‘저기’ 미래의 시계 속에서 환히 빛나는 그 무엇이다. 드디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려는 자여, 가지려는 자여, 그 누구라도 ‘칼 붓세’의 ‘산 너머 저쪽’ 한 번쯤 다시 외워보며 가져볼 일이다. 그것이 희망을 이해하는 길 아닐까. 그것이 희망을 이해하는 길 아니던가. 임창현/시인, 문학평론가

2017-07-13

[시가있는 벤치] 소로(小路)

소로(小路) -박남수 언젠가 왔던 길, 두리번거리지만, 우리가 언제 왔었는지 물어 볼 사람 이제 없네. 옆에서 늘 함께 거닐던 키가 작은 사람 굽어보아도 보이지 않네. 혼자서 거니는 좁은 길, 이제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네. 소로는 작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리라. 공원 길 늘 함께 손잡고 걷던 소로, 우리도 언젠가 둘 중 누군가 하나 사라지면 이렇게 탄식하리라. 언제나 함께 왔던 길,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을 사람, 없는 사람, 자꾸 두리번거릴 것이다. 그때, 이제는 분명히 없는 사람, 부러진 지팡이처럼 혼자서 발 내딛는 깊은 숲길, 아무리 보아도 그의 발자국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혼자 쉬는 숨도 무거우리라. 내 아내도 키가 작다. 그래서 더 안쓰러워 언제나 같이 걸어도 곁으로 내려다보던 얼굴. 푸른 하늘 속 비행기, 그날의 구름처럼 흐르고…. ‘LA 곰탕’이라 불렀던 저 비행기, 혼자 무심하게 멀리 사라진다. LA에 가면 때마다 꼭 들러 맛있게 먹었던 그 집 곰탕을 우리는 LA 곰탕이라 불렀다. 저 비행기 타면 갈 수 있는 곳, LA, 그러나 곰탕 하나 먹자고 가긴 그러니, 아니 못가니 설웁다. 비행기 소리 멀리 사라진다. 오늘은 이 하늘길이 나에게도 아주 좁은 소로가 되어 있구나. 언제쯤에나 손잡고 LA 곰탕집에 같이 갈 수 있을지. 왜 이렇게 소로가 좋을까. 그리울까. 나는 작은 사람이라서? 마음도 작게 살고 싶어 설까? 넓은 곳이 버겁다. 대로가 버겁다. 큰 집도 버겁다. 작은 길, 좁은 길, 조롱 길이 좋은 걸 어떡하랴. 나는 천상 마음 가난한 시인인가?

2017-06-22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영결 -박남수

영결(永訣) -박남수 조용히 누워, 너는 애통하는 이승의 사람들을 모르고 있었다. 곱게 신부처럼 화장을 하고 너가 가장 즐겨 입던 분홍색 한복을 입고, 너는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와서 찬송가를 부를 때도, 너는 노래 부르지 않았다. 듣고 있었지도 않았다. 이승의 것은 모두 버리고 갔다. 버리는 일이, 가장 깨끗한 일인 것처럼. 손도 흔들지 않고 마지막 인사도 없이 갔다. 모두 울고 있어도, 태연한 너를 처음 보았다. 그 울기 잘 하던 생전의 너의 모습은 없었다. ‘영결’ 을 다시 읽다가 갑자기 엄습한 겨울처럼 으스스한 느낌이다. 이즈음은 각각 책을 보느라 따로 잠들기도 하고, 그래서 손잡고 자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집 ‘그리고 그 이후’ 속 영결을 읽다가, 관 속 누워 있는 그의 아내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아내에게 물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옷 입어야 할까. 너는 어느 옷을 입혀주랴. 갑자기 하늘 나지막이 내려와 푸르지 않고 흐리다. 모든 것이 무위(無爲)요, 무용(無用)같다. 허무란 것이 이런 건가 보다. 삶이란 결국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슬픈 교차로다. 이 자리에서 누가 감히 에로스만의 신호등을 켤 수 있으랴. 다시 수없이 긴장하고 놀라 깨어야할 곳, 죽음의 자리. 이 살아있음의 자리.

2017-06-08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하관 -박남수

하관(下棺) 박남수 무덤을 파고 너는 관 속에 누워 있다. 둘레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애통하며 관 위에 꽃을 던진다. 흙도 뿌린다. 눈썹에 가리인 눈물을 통하여, 나는 너의 모습을 지우고 있다. 맑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눈물로 너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었다. 누구의 만남도, 결국은 이렇게 갈리기 위하여 있었겠지만. 눈물의 투명을 통하여 자꾸 흔들어 지우면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거리를 만들고 있다. 흙을 덮고 나면 그뿐, 저 넓은 품에서 너를 다시 찾기는 어려우리라. 안녕, 안녕. 당신보다 두 해 먼저 간 아내 강창희(전 이대 음대 피아노과 교수)를 떠나보내고 장지에서 운 박남수의 울음 시다. 이즈음 부음(訃音) 광고가 잦다. 그중엔 내가 그의 문학 사랑을 한국문단에 알려주었던 나의 친지(이병기 시인)도 있다. 허탈했다. 자신이 의사인데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도리가 없나 보다. 100세 시대에 회의가 온다. 아무튼, 지인들의 부음을 접할 때 우리는 멈칫 무엇을 생각하는가. 자신을 그 자리에 뉘어보는 찰나의 성찰이 머물지는 않을는지. 다시 멈칫해보는 것이다.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결국 그것은 한갓 구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허무와의 화해요 절망의 승화다. 생과 사, 그 이분법의 국경에서 존재 이상의 희망가치는 없지 않을까. 죽은 자는 묻고 산자는 그곳을 떠난다. 그것이 생자(生者)와 멸자(滅者)의 질서요 지상의 율법이다. 나와 아내는 슬픔 나누어 갖지 말고 함께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때, 세상은 모를 일, 누구도 우리를 찾아 나서지도,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가고 싶은 것이다. 올 때 울고 왔으면, 갈 때는 웃으며 갈 법도 한데…. 그게 그리 안 되나 보다.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2017-05-25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여기 화석으로 피어서

여기 화석으로 피어서 장효정 이민이란 계절풍을 타고 불타는 사막에 떨어진 새 한 마리 꿈밖에 던져진 꿈들이 길을 찾아 물길을 내며 흐르던 건기의 초원 팽팽히 하늘 겨루며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는데 사막에서 자라는 것은 바람 뿐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고단한 새의 생은 눈물로 견뎌야 하는 일인 줄 알았네. 헛디딘 삶에 꽃이 되지 못한 시간들 어찌 할 겨를도 없이 놓아버린 시간들이 얼룩으로 박혀 화석으로 핀 나는 가시 돋친 불안을 껴안고 뒤쳐진 발톱으로 자꾸만 떠나온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네. 우리는 이 땅에서 이제 화석이 되어 가는가? 우리 후세들에게 디딤돌로, 기억으로의 화석 말이다. 이 대지의 불타는 사막에 떨어진 한 마리 새, 꿈밖으로 던져진 꿈들, 내면의 길 찾아 물길을 내며 향하던 초원, 하늘 겨루며 팽팽히 날려 보냈던 삶의 화살들, 바람을 찢고 비상해야 하는 또 하나의 고단한 새의 삶, 그것은 눈물로 건너야 하는 강이었다. 날마다 헛디딘 삶에 꽃이 되지 못한 시간들, 놓아버린 시간들이 어찌할 겨를도 없이 얼룩으로 박혀 화석으로 피던 우리, 가시 돋친 불안을 껴안고 뒤쳐진 발톱은 자꾸만 떠나온 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2017-05-18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어떤 슬픈 사설(辭說) -임창현 3포, 5포, 7포- 가짜미인, 가짜미남, 가짜뉴스, 도적, 좀비, 사이코 패스 득실거리고 불 지르고 다니는 간첩 있는지 불 안 나는 날, 안 나는 곳 없는. 자식은 부모를, 애미 애비는 제 새끼 죽이고 세상 언제부터 이리 되었나. 전쟁설 검은 구름 날마다 떠도는데 내 나라 내 땅도 내 맘대로 못하는, 삼년동안 울고 운 세월호 나라, 이제는 사드 나라 비 만 오면 맨 홀로 길 꺼지고 옹벽 무너지고 언덕 쓰러져 집 주저앉고 동네 덮치는. 애들이 미세먼지 마스크 쓰고 공부해도 황해 쪽 나라에 말 한마디 못하는, 미-중 간 직거래에 왕따 당할 징조는 곳곳인데, 대사는 떠나고 석 달씩 소식도 안 주는 이웃 친구란 나라, 이놈도, 저놈도, 코리아 패싱, 평화만 외치면 멸시 당한다면서도. 머리는 비어 있고 입만 산 오잠룡(五潛龍), 십잡룡(十雜龍) “일방적 선제타격은 안 돼”(文) “전쟁은 절대 안 돼”(安) “어떤 군사행동도 안 돼”(沈) “나는 대통령되면 김정은한테 제일 먼저 갈 거야”(文) “새 대통령 취임 땐 우리 꼭 불러라” 명령하듯 말하는 북(北)망나니 4대 군사대국 화점(火點)이 겨냥하는 반 토막 내 땅, 강화도 수호조약 이후 그렇게 살아온 우리 141년! “우리는 할 수 있다” 말할 모세 같은 사람 어디 없습니까?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아! 우리나라, 아픈가슴 나라, 그리운 내 형제여!

2017-04-27

[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김포 별곡

김포 별곡 -박남수 하늘에서 반짝이는 대낮의 별처럼 반짝이면서 멀어져 간 이별은 실로 어처구니없게, 우리 목전에서 기수를 쳐들었다. 이별하기까지의 수속은 아직 인간의 냄새가 났지만 한 번 지상을 박차는 그 순간은 실로 어처구니없게 직절(直截)한 것이었다. 인류의 소리를 모두 합친 것만치나 큰 통곡을 하고, 몇 번 안간힘을 쓰고 그리고 이륙하는 그 순간은 비(非)유크리트의 포물선을 그으면서 쾌청한 하늘에서 반짝이는 대낮의 별처럼 기체를 은빛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이별은 실로 어처구니없이 쾌적한 것이었다. <시평> 이별이란 언제나, 어디서나, 그 누구와도 그런 것인가 봅니다. 기막혀오는 이륙, 그 순간 기체는 대낮의 별처럼 반짝이면서 모든 것을 박차버리고 하늘로 납니다. 이별하기까지의 수속은 아직 인간의 냄새가 났겠지만 막상 지상을 박차고 오르는 순간은 실로 어처구니없게 직절한 것입니다. 요동치는 기체는 인류의 소리를 다 합친 것만큼이나 큰 통곡을 하고 비유크리트의 포물선을 그으면서 대낮의 별처럼 은빛을 노래합니다. 그때 갑자기 이별은 차라리 쾌적한 것으로 다가오고 체념은 구름처럼 우리를 감쌉니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조국은 그렇게 우리들의 등뒤로 멀어져 갔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쾌적한 것이란 느낌은 순간에 온 기막힌 체념의 허탈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별을 완벽하게 확인하는 반어였습니다. 저간 있었던 조국 헌정사의 불행을 보며,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그냥 서럽습니다. 시인에게는 조국을 떠나는 말 못할 애린을 껴안는 노래였겠지만, 나에겐, 아마도 작은 조국사랑이 남몰래 앓아야할 피하지 못할 동병상련, 그 ‘조국애의 별곡’으로 들려오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임창현/시인, 문학평론가

2017-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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